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루스 오로시우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. 단지 375년 또는 385년에 히스파니아 갈라키아(Hispania Gallaecia)의 [[브라가]]에서 상류층 가정의 자제로 출생하여 좋은 교육을 받았고 20세 이전에 성직자가 되었다는 것만 알려졌다. 그는 414년 이민족의 침략으로 위험해진 히스파니아를 떠나 북아프리카의 히포에서 왕성한 성직 활동을 수행하고 있던 [[아우구스티누스]]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.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탁월한 언변과 [[이단]]에 대한 강렬한 투쟁심을 마음에 들어했고, 415년 예루살렘에 보내 이단으로 여겨지는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게 했다. 그는 예루살렘의 주교 [[히에로니무스]]와 신학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, 펠리기우스의 주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뒤 이단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와 대결했다.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설파하자, 펠라기우스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. >Et quis est mihi Augustinus? >나한테 아우구스티누스란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? 공의회는 예루살렘 대주교 요한 2세가 펠라기우스를 지지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고, 펠라기우스의 지지자들은 로마에 오로시우스의 정통성을 문제삼고 그야말로 이단이라고 고발했다. 그는 이 비난을 뿌리치기 위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를 집필했다. 416년 초 팔레스타인을 떠난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[[순교자]] 성 스테파노의 유물을 브라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왔다. 그 과정에서 히포에 들러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히에로니무스의 편지를 전달했다. 이후 브라가로 돌아간 그는 <이교도에 대항한 역사>와 <프리실리아주의와 [[오리게네스]]주의자들의 오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경고와 상기>를 416~17년 무렵에 출간했다.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